캐나다에서 Soju로 살아남기 · 5

산에 오르고, 책을 잊고, 필름을 맡긴 날

이야기 시기: 2022년 2월 10일 · 빅토리아
공개: 2026-10-11 · 글 Soju Lee

쉬는 날이었다. 며칠 만에 쉬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일하는 걸 꽤 좋아하는 편이고, 대학생 때부터 일과 술에 빠져 지냈다. 캐나다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지 5일이 됐다는 사실은 그때의 나에게 꽤 긴 기록이었다.

오랜만에 생긴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전날 밤 잠들기 전에 할 일을 적었다. 집 뒤 Douglas Mountain 정상에 오르고, UVic 서점에 들르고, 포케를 먹고, 필름 카메라의 남은 컷을 다 찍고, 도서관에서 레쥬메를 뽑아 지원할 곳에 돌리는 순서였다. 계획표를 촘촘히 짠 건 아니었다. 원래 계획대로 못 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상하는 편이라 이번에는 목록만 남겼다.

정상까지는 한 시간, 위치는 몰랐다

아침에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필름 카메라와 태블릿을 메신저백에 넣고 집을 나섰다. Google Maps에는 집에서 정상까지 한 시간이 걸린다고 나왔지만, 그 한 시간이 내 걸음으로도 한 시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 가는 길에서는 시간이 맞는지보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가 더 신경 쓰인다.

산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경사가 아주 가파르지는 않았고, 어디가 정상인지 몰라서 걷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개를 산책시키며 올라가던 사람이 이 길이 정상으로 가는 길인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줬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각자 다시 올라갔다.

조금 더 가파른 구간을 지나자 정상에 닿았다. 사방으로 밴쿠버 아일랜드가 보였다. 구름이 조금 끼어 있어서 아쉬웠지만, 높은 곳에 올라오면 파노라마 사진을 찍는 습관이 있어 몇 장 남겼다. 숨을 돌린 뒤 내려오는데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이끼가 눈에 들어왔다. 비가 잦고 습한 곳이라 돌과 나무에 이끼가 많이 붙어 있었고, 내려오는 길에는 발이 미끄러워 조심해야 했다.

책을 잊고도 다음 장소로 갔다

산을 내려온 뒤에는 다운타운으로 바로 갈지 UVic에 들를지 잠깐 고민했다. 어차피 다운타운에 가려면 UVic에서 환승해야 해서 먼저 학교 서점에 들어갔다. 사고 싶었던 책을 보러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어떤 책이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친구와 통화하며 서점과 학교 굿즈를 구경했다. 학생들이 자주 입는 후드와 맨투맨이 실제로 보였고, Champion과 UVic이 함께 만든 후드티가 할인 중인 것도 눈에 들어왔다.

원래는 학교를 조금 더 구경하고 수업 중인 교실이 있으면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공복으로 두 시간 가까이 움직인 뒤라 배가 먼저 신호를 보냈다. 다운타운으로 가서 포케를 주문했다. 서브웨이처럼 그릇인지 부리토인지, 어떤 단백질과 채소와 소스를 고를지 정해야 해서 처음에는 주문 방식이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어렵게 고른 뒤 먹어보니 연어가 조금 적고 채소가 많은 사케동 같은 맛이었다. 팁까지 더하니 거의 20달러에 가까웠지만, 한 끼를 제대로 먹었다는 느낌은 있었다.

그다음 목적지는 도서관이었다. 세 번째 일을 구하기 위해 기존 레쥬메를 조금 고쳐 새로 뽑아야 했다. 도서관에서 간단히 회원가입을 하면 컴퓨터와 프린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날은 레쥬메를 출력하는 일만큼은 처리하려고 했다. 말차가 먹고 싶어서 봐둔 가게에도 가고 싶었지만 20분을 더 걸어야 했다. 결국 말차를 파는 곳까지 가지 않고 Bobadog에 들러 말차를 샀다.

아침부터 산을 다녀온 탓인지 몸이 피곤했다. 레쥬메를 들고 동네를 돌며 지원하려던 계획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멈췄다. 집에서 Indeed를 열어보니 내가 가능한 시간에 지원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dishwasher였다. cashier로 일하고 싶었지만 당장 보이는 자리가 없었다. 우선 dishwasher로 구해지면 그 일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동네 grocery에 레쥬메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쥬메를 열 장 뽑았으니 열 곳을 돌리면 한 곳쯤은 구해지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계산했다.

집 앞 London Drugs에서 필름을 현상할 수 있다는 기억도 떠올랐다. 필름을 맡기며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는데, 설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검색했다. 그날 오후 맡긴 사진은 저녁에 이메일로 왔다. 건진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았지만,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라는 점만으로 마음에 드는 장면들이 있었다.

한 끼와 심부름 사이에서 속도를 늦췄다

지금 보니 쉬는 날에도 욕심이 꽤 많았다. 산에 다녀와서 학교를 구경하고, 밥을 먹고, 레쥬메까지 돌리려고 했다. 산에서는 길을 물으면 됐지만 구직은 가게에 들어가 다시 영어로 말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같은 외출이라고 한 목록에 넣어놓았는데, 필요한 힘은 달랐을 것 같다.

다시 이런 휴일을 만든다면 오전에는 움직이는 일 하나, 오후에는 반드시 처리할 일 하나, 집에 돌아와 확인할 일 하나만 남길 것 같다. 그날 나는 산행 뒤 레쥬메를 돌리지는 못했지만, 집에서 어떤 일에 지원할지 다시 좁혔고 필름 결과물도 확인했다. 계획에서 빠진 일이 생겼다고 하루 전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쉬는 날을 다시 짠다면

혼자 움직이는 날에는 출발 전에 목적지를 많이 추가하기보다, 고정할 순서와 포기해도 되는 순서를 나눠두면 좋다. 당시의 하루를 지금 다시 쪼개 보면 산처럼 몸을 쓰는 일, 포케처럼 식사 시간을 정하는 일, 도서관처럼 꼭 처리할 일, 필름처럼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 한꺼번에 들어 있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필요했지만 같은 강도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필요한 항목만 확인해보세요. 체크 상태는 저장되지 않습니다.

그날 못 돌린 레쥬메는 다음 외출에 가져가면 된다. 지금 다시 그 하루를 본다면, 집에 돌아온 뒤까지 일을 더 시키지는 않고 싶다. 저녁에 도착한 필름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드는 몇 장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괜찮았을 것 같다.

다음 출근부터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는 쉬는 날처럼 내가 순서를 정할 수 없다. 누군가 메시드 포테이토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대답하게 된다.

다음 이야기 · 2026-10-18 일요일

메시드 포테이토를 못 만든다고 대답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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