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4일 아침, 휴대폰 진동에 잠이 깼다. 전날 친구와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신 뒤라 세 시간쯤 잔 상태였다. 비행기가 지연됐다는 문자였다.
출국 당일까지 환전도 알뜰폰 유심 교체도 하지 못했다. 할 일은 남아 있었지만, 별일 없이 잘 풀릴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비행기 지연 문자를 보니 정신이 확 들었다. 메일을 열어보니 실제로 일정이 바뀌어 있었다. 항공기에 문제가 생겨 아직 인천공항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지연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문자가 한 번 더 왔고, 한참 뒤에 다시 시간이 바뀌었다. 저녁 7시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는 저녁 9시 45분 출발이 됐다. 모두 합치면 2시간 45분이 늦어진 셈이었다. 출발이 밀렸다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일까지 같이 밀리는 건 아니었다.
캐나다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영어와 문화라고 생각해왔다. 네이티브처럼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과 불편함 없이 대화하고 그 사람의 영어를 알아듣는 쪽에 가까운 목표였다. 한국에서만 통하는 말과 생활에서 잠시 떨어져,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도 직접 보고 싶었다.
출국 전에는 유니클로에서 몇 달 동안 일했고, 쉬는 날에는 언어교환 파트너와 영어로 통화했다. 나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출국 당일 아침에 남은 일들을 보니 영어 통화만 열심히 한다고 끝나는 준비가 아니었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일
출국 전 PCR 검사는 오후 1시로 인천공항에 예약해두었다. 비행기가 늦어져도 그 시간까지는 공항에 가야 했다. 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오르내리는 일을 줄이려고 택시를 탔다. 평소라면 아깝게 느낄 돈도 이런 날에는 몸을 덜 쓰는 쪽에 쓰기로 했다.
검사를 받고 점심을 먹었다. 전날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공항 의자에 누워 잠깐 잠들었고, 친구들과 전화도 했다. 오후 5시쯤 함께 온 친구가 돌아간 뒤 수속을 마쳤다. 그런데도 비행기까지는 네 시간이 남았다.
나는 시간을 버리는 일을 싫어한다. 그날만큼은 한국이 나를 쉽게 떠나보내지 않나 보다,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계획이 틀어진 시간을 일부러 생산적인 시간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 그냥 공항에서 버티는 시간으로 두었다. 출발 전에는 기다림도 여행의 일정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 안에서 달라진 거리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내 뒤에 앉은 승객이 집에 간다는 말을 했다. 그 사람에게 비행기는 돌아가는 길이었고, 나에게는 1년 동안 살아보러 가는 길이었다. 같은 비행기 안에서도 캐나다를 대하는 위치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만 그 차이를 오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옆자리가 비어 있어서 세 자리의 팔걸이를 올리고 누워 갔다. 부족했던 잠을 채우려고 계속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도 남은 시간이 여섯 시간, 네 시간으로 줄어 있을 뿐이라 다시 잠을 청했다. 장거리 비행 때 술을 한 잔 마시면 잘 잘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날은 술을 찾을 기운도 없었다.
자도 개운하지 않았고, 눈을 뜰 때마다 비행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아직 영화 몇 편을 더 볼 시간이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또 잠들었다.
밴쿠버에서 한 번 더 물어봤다
비행기는 시간을 거슬러 밴쿠버에 도착했다. 12월 14일 밤에 출발했는데, 시차 때문에 밴쿠버 시간으로는 같은 날 오후 2시였다. 한두 시간 뒤 빅토리아행 비행기를 타야 해서 몸을 서둘러 움직였다.
입국심사와 워크퍼밋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현실적인 영어를 만났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대충 알겠는데, 내가 정확히 들은 게 맞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여러 번 다시 말해달라고 했다. 친절하게 응대하던 심사관의 표정이 굳는 것이 보이자 괜히 미안해졌다. 그래도 그냥 넘길 수는 없어서, 필요한 말을 다시 확인하며 절차를 끝냈다.
워크퍼밋을 받고 국내선 환승을 하러 갔다. 밴쿠버공항은 처음이라 에어캐나다라고 적힌 긴 줄에 섰는데, 나중에 보니 국제선 줄이었다. 국내선 줄을 다시 찾아가 수속했다. 공항이 크고 시설도 좋았지만, 곳곳에서 인천공항보다 조금 낡았다는 느낌도 받았다. 어느 줄에 잘못 섰는지, 어디서 다시 물어봤는지도 같이 기억에 남았다.
빅토리아행 비행기는 밴쿠버까지 타고 온 비행기보다 훨씬 작았다. 날개 바깥으로 블레이드가 보이는 비행기였다. 피곤해서 이륙 뒤 거의 기절하듯 잠들었고, 착륙할 때 충격에 눈을 떴다. 공항에는 픽업을 와준 지인이 있었다. 20킬로에 달하는 캐리어 두 개를 끌고 환승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그날의 이동이 끝났다.
집에 도착해서는 짐을 조금 풀고 씻은 뒤 잠들었다. 여행을 시작했다는 기분을 만끽할 여유보다, 하루 동안 미뤄진 시간과 이동을 몸으로 정리하는 일이 먼저였다. 캐나다에 도착한 날의 기억은 새로운 풍경보다 지연 문자, 잘못 선 줄, 다시 물어본 영어처럼 생활에 바로 부딪힌 일들로 남았다.
다시 출발한다면
지금 그날의 나를 보면 비행기 지연보다 전날의 술자리부터 줄이라고 하고 싶다. 출발 시간은 내가 바꿀 수 없지만, 잠과 환전과 통신 준비는 조금 일찍 챙길 수 있었다.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뭔가 더 할 기운이 없었던 건 내 준비 탓도 있었다.
다시 출발한다면 이 네 가지는 공항에 가기 전에 확인하고 싶다.
캐나다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 생활이 시작되는 건 아니었다. 다음 날에는 SIN Number를 받으러 갔다가 줄을 서고, 은행과 면허센터를 오가며 필요한 일을 처리해야 했다. 여행 가방을 내려놓은 뒤부터는 도착한 사람의 행정이 시작됐다. 그리고 며칠 뒤, 그 행정과 함께 첫 일자리를 찾으러 빅토리아의 가게들을 돌아다니게 된다.